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살바도르 달리의 무대 그림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스위스 출신의 연출가 다니엘 핀지 파스카의 손을 거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아트 서커스 공연으로 재탄생했다. 서커스, 연극, 무용, 미술이 하나가 된 라 베리타는 현대 공연예술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다.
살바도르 달리와 잊혀졌던 무대화, 65년 만의 귀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41년 뉴욕에서 첫 번째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미국 예술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무렵 달리는 당대 최고의 안무가였던 레오니드 마신으로부터 독특한 제안을 받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될 발레 광란의 트리스탄의 무대 미술과 의상을 담당해달라는 것이었다. 달리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직접 배경막을 그리기에 이른다.
이 배경화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재회를 주제로 달리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표현된 거대한 그림이었다. 높이 9미터, 너비 15미터에 이르는 대형 작품으로, 달리의 무대미술 실험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이 그림은 창고 어딘가에 보관되었다가 잊혀졌고, 사람들은 이 작품이 영영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20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창고에서 이 그림이 기적처럼 발견된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 안에서 달리의 원본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발견은 미술계뿐 아니라 공연예술계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곧바로 이 작품은 경매에 부쳐져 한 유럽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단순히 박물관에 걸어놓는 것보다는, 이 그림이 원래의 목적대로 무대에서 사용되기를 바랐고, 이 작품을 실제 공연에 사용할 예술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간 작품을 무상으로 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 선택을 받은 이가 바로 세계적인 서커스 연출가 다니엘 핀지 파스카였다.
다니엘 핀지 파스카, 달리의 세계를 무대 위로 옮기다
스위스 출신의 연출가 다니엘 핀지 파스카는 마임이스트이자 작가, 연출가, 안무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전천후 예술가이다. 그는 서커스를 단순한 볼거리나 곡예에서 벗어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인간의 내면, 감정, 기억을 서커스 언어로 풀어내며 시적이고 철학적인 무대를 창조해왔다.
그는 태양의 서커스와 서크 엘루아즈에서 연출한 코르테오, 레인, 네비아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폐막식과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의 연출자로 참여해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그는, 대형 이벤트와 예술적 무대 양쪽에서 모두 실력을 입증한 인물이다. 서커스에 기반을 둔 연극적 연출과 시각 예술, 음악, 조명이 결합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선 종합 예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달리의 유실됐던 무대 그림이 주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사건이었다.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시각 언어는 핀지 파스카가 추구해온 예술의 지향성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의 작품을 마주한 그는 강렬한 예술적 충격과 함께 영감을 얻게 되었고, 이 그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연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전시나 삽입이 아닌, 달리의 정신과 세계관 전체를 무대 위로 소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그는 대본 집필과 연출에 착수했다. 이로써 65년간 잠들어 있던 그림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연 예술로 부활하게 되었다.
초현실주의와 서커스의 융합, 라 베리타의 세계
다니엘 핀지 파스카의 손에서 탄생한 라 베리타는 201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달리의 그림을 둘러싼 허구적 경매 스토리를 토대로 다양한 서커스 요소가 결합된 연극적 무대를 보여준다. 흔히 접하는 곡예나 저글링, 공중그네 같은 서커스 기술을 단지 기교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달리의 예술 세계와 감각적으로 결합시킨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공연은 수채화 같은 조명과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반라의 무용수가 밧줄을 타고 공중으로 떠오르고, 달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인 코뿔소나 기형적 존재들이 무대 위에 등장해 시적이고도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그들은 붉은 실타래를 던지고,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관객의 시선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회화처럼, 무대는 전통적인 극장의 틀을 깨고 미술과 움직임이 조화된 시각 예술로 재탄생한다.
비평가들은 라 베리타를 단순한 서커스나 연극이 아닌, 전혀 새로운 예술 장르로 평가했다. 공연은 초연 이후 북미, 유럽, 남미,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400회 이상 공연되며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미국의 브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 홍콩 아트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고, 언론은 이 작품을 꿈과 현실, 초현실과 무대예술의 경계를 넘는 경험이라 극찬했다.
라 베리타는 2017년 5월 한국에서도 초연되어 국내 관객에게 아트 서커스의 진수를 선보이게 된다. 이 공연은 현대 공연예술이 지닌 확장성과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무엇보다 하나의 그림이 새로운 예술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현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달리의 사라진 그림과 핀지 파스카의 창의력이 결합해 만들어낸 이 무대는 미술, 무용, 연극, 음악을 넘나드는 복합적 체험의 장이며, 관객에게 꿈결 같은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